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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아우내 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극일 의지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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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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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논문“일제의 황국신민서사탑 표면에아우내만세운동 내용 새겨 넣었다”일제의 잔재 주장 정면으로 뒤집어유관순기념사업회가 1947년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아우내 독립만세운동기념비’(기념비)를 세우면서 일제의 황국신민서사탑의 표면을 갈아낸 뒤 아우내만세운동 내용을 새겨 넣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극일(克日)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기념비의 형태가 일본 군대의 묘비를 닮았다. 일제의 잔재로 보인다”는 일각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연구 결과다.● 극일의지의 ‘아우내 만세운동비’조한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사진)은 12일 백석대에서 열리는 유관순 탄생 120주년 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 ‘1947년 병천, 감격스러운 기억의 소환’을 발표할 예정이다.그는 논문에서 “기념사업회는 독립 선열의 충혼을 위로하기 위해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강요했던 황국신민서사(천황의 신하로서의 충성 맹세) 비문을 갈아내고, 그 위에 유관순 열사 행적과 아우내만세운동 순국자 명단을 새겼다”고 밝혔다. 극일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제작 방식이라는 것이다.이 같은 발표 내용은 조 원장이 ‘순국처녀 유관순 실기(實記)’에서 최근 새롭게 찾아낸 다음과 같은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기념비 석재는 왜적이 우리 민족을 황민화하려고 가장 애쓰던 소위 황국신민서사탑이라는 것을 연마(鍊磨)하야 쓰기로 하였다. 일본제국(倭帝)의 위선과 포악의 상징이며 우리 민족에 존경 혹은 숭배를 강요하던 중심체인 소위 황국신민서사탑이 변하야 우리 선열의 충혼비가 되였다는 것은 그 얼마나 통쾌한 일이며 천상에 계신 열사의 영령(英靈)도 그 얼마나 기꺼우시랴!’주민대표 유제만이 작성한 실기는 유관순기념사업의 전말을 담은 종합보고서로 포털사이트(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에도 지난해 3월 전체 내용이 공개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상세한 학술적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다.그동안 이런 제작 과정이 알려지지 않으면서 기념비가 일제의 잔재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8월 한 방송사는 ‘기념비의 형태가 일제 군대 묘비인 상첨비(上尖碑)를 베낀 것이고 이런 행태는 독립운동가를 더욱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보도를 하기도 했다. 조 원장은 “기념사업회는 황국신민서사탑 표면을 갈아내고 만세운동을 기록하는 방식의 제작을 되레 열사들이 기뻐하실 통쾌한 쾌거로 여겼고 그에 따라 이 비를 일제를 몰아낸 걸 기념하는 전승비(戰勝碑)로까지 생각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유관순 선양은 고향 주민이 주도기념비의 비문은 독립운동가이며 한학자였던 정인보가 짓고, 당시 20대 서예가인 김충현이 쓴 광복 후 최초의 한글비다. 정인보는 1920년대 천안 목천에 거주한 인연으로 유관순기념사업 초기부터 적극 참여했다. 기념비의 원래 제목은 ‘기미독립운동 때 아우내서 일어난 장렬한 자취라’였다.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은 28년 만인 1947년 2월 소설가 박계주에 의해 유 열사의 순국 사실이 처음 알려지면서 기념비 건립, 영화 촬영, 전기 출간 등의 기념사업으로 이어졌다.논문에 따르면 당시 병천(아우내)에 있던 유관순기념사업회는 주민 주축으로 움직였다. 순국자 조사, 영화 촬영 지원, 의연금 모금, 기념비 제작 및 제막식 준비 등의 기념사업은 모두 주민들 손으로 이뤄졌다. 이는 초기 유관순 기념사업이 ‘친일-우익-기독교 계열’에 의해 이뤄졌다는 일부 진보 역사학계의 주장과도 배치되는 것이다.실기는 기념사업을 벌이던 당시 마을 분위기를 “우리는 다시 삼십 년 전 기미독립운동 당시의 기분으로 돌아갔다”고 표현했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영화 장면을 찍을 때에는 인근 지역 주민까지 합세해 30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947년 11월 27일 1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기념비 제막식은 그해 12월 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상세히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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