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열린광장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 발전 시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열린광장
행사와소식
[기획칼럼] 충청 바다를 지키던 수군 본부
  •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7-15 조회수 : 67
▲ 조선시대 충청수영이 자리해 있던 충남 보령 오천면 소성리 일대
[충남도정신문 기획칼럼] 충남의 성(城) - 충청수영성
충청 바다를 지키던 수군 본부
백성·조운선 지키던 요충지
수군 5000명·배 90척 운영
열강 침입 대비 방어 강화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왕세자 광해군은 조정을 나눠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지휘했다. 요충지를 따라 주둔지를 이동하던 중 충청수영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미리 살펴보고 돌아온 백사 이항복은 수영성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보고했다. 훗날 그 이유를 말하기를, ‘충청수영 영보정의 경치는 호서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니 왕세자가 이곳에 있다가 방탕하는 마음을 가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보령의 충청수영은 군사 거점이면서 뛰어난 경관을 가진 곳으로 유명해 중국의 소주(蘇州)에 비견됐고 방문한 사람마다 글을 남겨 현재 전해지는 것만도 100여 편에 이른다.
충청도 서해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중요한 교통로로 활용됐다. 고려말 해적질을 하던 왜구가 한반도 서부지역으로 들어온 길이며,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실은 배(조운선)가 서울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조운선을 지키기 위해 나라에서는 지금의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수영성을 구축해 수군을 배치다. 바닷길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던지 조선 초 육군본부인 충청병영까지 해미에 뒀을 정도였다.
충청수영은 1396년(태조 5)에 ‘고만(현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에 구축됐다가 어느 시기인가 오천으로 옮겨졌고 1510년(중종 5)에 돌로 성곽을 쌓으며 비로소 수영성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수영이 자리한 소성리는 천수만에서 육지로 깊이 들어간 작은 만의 언덕배기로, 앞바다에 작은 섬과 암초들이 많아, 지리를 모른 채 배를 끌고 들어오다가는 큰 사고를 당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물결이 크게 일지 않는 데다 수심도 깊어 정박한 배가 안전하게 보호되는 천혜의 요새였다.
조선 후기 30여 동의 관청 건물이 들어섰고, 충청수사의 지휘 아래 바닷가 18개 고을 5000여 명의 수군병력과 90여 척의 배가 운영됐다. 해안 방어의 임무는 19세기에 외국의 배가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엄중해졌다. 서해안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대민 지원과 치안을 맡아, 천주교 박해 때 수영으로 끌려온 천주교도를 인근 갈매못에서 처형하는 업무도 수행했다.
수영과 병영 그리고 전국의 진영은 1895년 을미개혁 때에 폐지됐다. 일본은 조선의 군제 개혁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군사력을 크게약화했다. 1901년에는 보령 군수가 휘하의 군속 등 1000여 명을 끌고 와 수영성 안의 건물을 불태워 버리면서 객사 등 몇 개의 건물만 남았다. 그럼에도 충청수영성은 우리나라의 다른 수영성에 비해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이다.
/홍제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