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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장날이면 150척 어선 오갔다”
  •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6-09 조회수 : 600
▲ 옹암리 도로변에 세워 놓은 부상감의비
[충남도정신문 기획칼럼] 내포 포구 이야기 - 홍성 옹암포
“장날이면 150척 어선 오갔다”
20세기 전성기… 경제중심지
보부상 번성 홍도원 등 흔적
옹암포(甕巖浦)는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에 있던 포구로, 1960년대까지 내포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포구 중에 하나로 번성하였다. ‘옹암’이라는 지명은 마을 가운데 항아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 유래한 것으로, 일명 ‘독배’, ‘독바위’로도 불린다. 옹암포가 형성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19세기 이후 내포지방의 주요 포구로 문헌과 지도에 등장하고 있다. 1872년 제작된 ‘보령부 지도’와 ‘결성현 지도’에는 ‘옹암포’가 주요 포구의 하나로 표기되어 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옹암포는 포구로 기능했으나 점차 갯고랑에 토사가 쌓이면서 선박의 출입이 어려워졌고, 1990년대 보령 방조제가 준공되면서 폐쇄되었다.
옹암포는 보령 오천항에서도 내륙으로 10여km 더 들어온 육지 깊숙한 곳에 형성된 포구였다. 그만큼 수운을 통해 내륙으로 물자를 운송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물류유통의 거점인 포구는 대개 장시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포구시장이라는 뜻의 ‘포시(浦市)’로 표현되기도 한다.
옹암포에도 장시가 열렸으나 옹암포는 인근의 큰 장시인 광천장의 배후포구로 입지를 다졌다. 옹암포와 광천장은 짝을 이루어 하나의 포구 경제권을 형성하며 흥망성쇠를 함께 해 왔다.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내포지방의 다른 포구들이 20세기 들어 쇠퇴의 길을 걸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옹암포는20세기 초중반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개항장인 군산과 연결하는 장항선 철도가 광천장을 가로질러 놓이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철도가 놓이면서 광천장과 옹암포는 수로와 육로교통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서해안의 물산이 집산·배분되는 내포지방의 최대 경제 중심지로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광천장이 서는 날에는 옹암포에 150척 이상의 어선들이 드나들었고, ‘관청 많은 홍성에 가서 아는 체하지 말고, 알부자 많은 광천에 가서 돈 있는 체하지 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포구와 장시가 활성화되면서 전통시대 물류유통과 소매상으로 상업의 말단에 위치해 있던 보부상들도 옹암포와 광천장을 무대로 번성하였다. 광천장과 옹암포에는 조선시대부터 홍주·결성·보령·오천·청양·대흥을 관할하던 보부상 조직인 원홍주 육군상무사의 임소(사무소)가 운영되었다. 보부상의 흔적은 병든 보부상의 구호처이자 공동묘지로 옹암포 인근에 마련된 ‘홍도원’과 광천장에 세운 ‘부상감의비’로 남아있다. 홍도원은 옹암출신 보상 조재수가 출연한 재산으로 조성하였고, 부상감의비는 동학농민군 진압에서 활약한 부상반수 김병돈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옹암포는 폐쇄되고 광천장도 옛날 같지 않지만, 광천장은 아직까지 옹암 토굴에서 숙성된 전국 최고의 토굴새우젓 시장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광천 토굴새우젓의 명성이 더 빛나기 위해서는 상가, 선박, 작업장 등의 건조물, 음식문화, 당제, 보부상 유적 등 포구취락이 남긴 문화유산을 종합적으로 보존·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유병덕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내포문화연구부장